개요
초기 기독교 공동체를 위협한 치명적인 문제들은 신약성경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내용들 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승천 이후 성장하기 시작한 기독교 공동체는 내외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많았습니다. 그러한 문제들을 해결 하기 위해 복음서의 기자들과 사도들이 복음서나 서신들을 통해 신앙을 지키고 공동체를 보호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초기 기독교가 성장할 당시 공동체들이 겪어야만 했던 어려운 상황들을 살펴보는 것은 신약성경을 바르게 이해하고 적용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를 위협한 영지주의
영지주의는 고대 다양한 지역에 보편적으로 펴져있던 사상이나 신앙으로 이집트와 바벨론, 페르시아 등의 종교와 신념 그리고 그리스의 철학이 만나 혼합된 형태로 종교혼합적인 세계관을 가지게 된다. 영지주의는 종교혼합적인 세계관을 바탕으로 신약시대에 성장하는 기독교 공동체에 침투하여 기독교를 흡수하려는 시도를 한다. 이러한 종교혼합주의적인 이단 사상은 1세기 중엽부터 2-3세기에 전성기를 맞이하고 4세기쯤 마니교에 흡수된다.
영지주의자들은 모든 현상을 둘로 나누어(이원론) 설명한다. 그들의 핵심 사상은 이렇다.
"정신은 선하고 물질은 악하다"
"비물질적인 것은 본질이며 우월하고, 물질적인 것은 허상이며 열등하다"
이들은 신과 세상을 둘로 나누며, 신께 속한것은 선하고 세상에 속한 것은 악하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곧 영혼은 신께 속해 있고, 육신은 세상에 속해 있다는 믿음으로 이어졌고, 영혼의 구원만을 추구하는 위험한 사상이 되었다. 신께 속한 영혼이 악한 육신에 묶여 세상속에 갇혀 있다고 생각한 그들은 신의 계시를 통해 특별한 지식을 소유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믿었다. 따라서 특별한 지식을 얻은자들은 구원을 위해 이 세상을 벗어나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특별한 지식을 전달하셨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영지주의자들의 사상은 두 가지의 생활방식으로 나타났다. 신께 속한 영혼이 더럽히거나 방해 받지 않도록 세상과 단절하는 금욕주의, 그리고 영혼이 신께 속해 있으니 정욕대로 살아도 된다는 방탕주의(쾌락주의)였다. 사도 바울은 서신들을 통해 자유를 남용하는자(방탕/쾌락주의, 고전6:12-18), 몸의 부활을 부인하는자(고전15:12,35), 신화와 족보에 집착하는자(딤전1:4), 거짓된 지식을 가진자(딤전6:26), 극단적 금욕주의자(딤전4:3), 성적 방종을 일삼는자(딤후3:6)들인 영지주의자들을 주의하라고 당부했다. 신약시대의 기독교 공동체는 영지주의적 잘못된 가르침 때문에 많은 혼란을 겪었으며, 복음서의 기자들과 사도 바울은 서신들을 통해 영지주의적인 가르침을 주의하라고 당부했다.
영지주의적 가르침의 핵심 사상인 '가현설'이 기독교 공동체에 치명적인 혼란을 발생시켰다. 예수가 세례받을 때 하나님의 영이 임재했다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하나님께로 돌아갔다고 가르치며, 예수는 실체가 아닌 유령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예수의 성육신을 거부했다. 예수의 성육신을 거부하는 것은 모든 인류를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무효화 시키는 것으로 기독교의 뿌리를 뒤흔드는 치명적인 위협이었다. 복음서의 기자들과 사도들은 이러한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에 맞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강조하며, 영지주의자들을 거짓교사, 미혹하는자, 예수를 부인하는자들이라고 말한다. 복음서 기자들과 사도들은 기독교의 뿌리를 뒤흔드는 가르침에 맞서 기독교 공동체의 신앙을 보호하려 애썼다.
전통을 강조한 율법주의
북이스라엘(주전722-721)이 멸망한 뒤 남유다(주전587-586)도 바벨론에 의해 멸망한다. 멸망의 원인을 율법을 준수하지 못한것에 있다고 생각한 그들은 율법준수와 할례 등의 언약의 표징을 엄격하게 지키는데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에스라의 주도로 이루어진 2차 귀환 이후 하나님의 율법과 구전으로 전해진 전통은 체계화를 거쳐 유지되고 계승되었다. 율법과 전통을 엄격히 준수하는 것에 모든 관심을 기울이면서 율법의 정신은 상실되고 점점 율법주의로 퇴색되어 갔다. 유대인들은 문자적인 율법행위에 몰입하게 되고 엄격한 율법과 전통 준수의 추구는 종교적 의에 집착하게 만들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승천 이후 기독교 공동체가 탄생했고,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계 기독교인도 생겨났다. 일부 유대계 기독교인은 예수를 메시아로 믿었지만, 한편으로는 유대교의 율법과 전통을 고수했다. 율법준수와 언약의 표징들이 지배했던 유대 사회속에서 살아왔던 그들은 믿음 하나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을 쉽게 받아 들이지 못했다. 그들은 이방 기독교인 역시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율법과 전통 및 할례를 준수하고, 정결법에 따라 음식을 가려 먹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바울은 믿음외에 다른 조건을 주장하는 자들을 십자가의 원수(빌3)라 부르기까지 했다. 기독교 공동체내에 이런 문제들이 드러나자 사도들은 예루살렘 총회(행15)를 열게 된다. 결국, 유대교의 율법과 전통이 복음에 방해가 된다면 강요해서는 안된다는 결정이 내려지게 되었다. 예루살렘 총회를 통해 이방인들을 향한 복음 전파는 활력을 얻게 되고, 이러한 결정은 구약의 구별사상의 해체를 알린 계기가 되었다. 유대교 전통을 고수하는 세력은 약화 되었지만, 일부는 기독교 공동체 내에 잔존하며 율법주의적 전통을 고수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지연 문제
재림은 승천하신 예수께서 다시 이 땅에 오시겠다는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 제자들에게 재림을 약속하신다(마25:31, 요14:3). 예수의 재림은 구속 역사의 완성으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의미하며, 이로 인해 교회는 완전해지고, 세상은 다시 새롭게 된다. 기독교 공동체는 이러한 재림의 소망을 기대하고 있었다. 재림에 대한 기대는 때로는 재림 준비에 집착하며 일상을 등한시 하는 모습으로 나타나 공동체 내부를 혼란스럽게 하기도 했다(데살로니가 공동체).
재림을 소망하면서 로마와 유대교의 정치적, 종교적 박해를 감당해야 했던 기독교인들은 재림이 지연되자 신앙이 약화되고, 배교의 위험에 노출되게 되었다. 일부는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이 생겨났고, 신앙이 흔들려 믿음을 저버리려는 사람들까지 생겨났다. 이에 복음서 기자들과 사도들은 고난 당한 예수를 상기 시키며, 예수를 믿는자들에게 닥치는 고난을 이해시키며 격려한다. 그리고 예수께서 죽음으로부터 승리하시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신앙을 바로잡고 공동체를 보호하려고 노력했다.
임박한 재림에 대한 기대와 재림지연에 대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날은 오직 하나님만 아시며, 그날이 올 때까지 늘 깨어서 예수께서 보여주신 모범을 따라 일상에 충실하며 사랑을 실천하는 실천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고 위로하며 권면했다.
로마 제국의 박해
주전 63년 로마는 그리스를 정복하고 패권을 장악한다. 이로써 이스라엘 땅은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된다. 로마는 지성소를 드나들며 신성모독을 일삼았고, 성전제물을 약탈하며, 가난한 사람들을 노예로 만들었다.
로마의 지지를 얻어 유대 땅을 통치한 헤롯대왕(주전37-주후4년)은 로마의 착취를 허용하였고, 헬레니즘(그리스-로마 문화)를 적극 장려하며, 로마 황제를 위한 신전을 세우기까지 한다. 이후 아우구스투스(아구스도, 주전27-주후14년)가 황제로 등극한 이후 세금징수와 황제숭배는 유대인들을 더욱 괴롭게 했고, 로마와 유대인들의 갈등을 심화 시켰다. 로마에 대한 유대인들의 증오는 고스란히 세금징수원인 앞잡이 세리들에게 돌아갔다.
예수께서 부활 승천 하신후 기독교 공동체가 생겨났고, 기독교 공동체는 유대교뿐만 아니라 로마 제국으로 부터 박해를 당해야만 했다. 로마 제국은 다양한 신들을 섬기고 받아들였기 때문에, 황제숭배를 거부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섬기는 기독교를 인정하지 않았다. 유대교도 자유롭지 못했던 것은 마찬가지 였지만, 유대교 역시 예수를 거부하며 기독교인을 인정하지 않았다.
네로 황제의 통치 시키(주후54-68)에 로마시에 불을 지른 방화범이라는 누명을 쓰고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많은 기독교인이 목숨을 잃었고,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대(주후81-96)에도 황제숭배를 거부 한다는 이유로 기독교인들이 박해를 당하고 목숨을 잃었다. 이 때 사도 요한은 밧모섬으로 유배를 당한다.
로마는 황제숭배를 거부하고, 타협하지 않는다는 이유와 성찬과 교제를 식인풍습과 성적타락으로 치부하여 기독교에 대한 박해를 멈추지 않았다. 로마의 통치 아래에서 기독교 공동체는 내부적으로는 영지주의와 율법주의로 부터 신앙 공동체를 보호해야 했으며, 외부적으로는 로마의 박해를 인내해야만 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이후에도 대대적인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는 간헐적으로 지속되었다. 로마의 박해 속에서 기독교인들의 눈에 비춰진 로마 제국과 로마 제국의 황제들은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사탄과 마귀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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