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신약시대 유대-로마 전쟁, 재앙의 시대, 예루살렘 함락

by 테오랩스 2023. 3. 2.
반응형

유대-로마전쟁

개요

유대-로마 전쟁으로 예루살렘은 함락 되었고, 성전이 폐허가 되면서 성전 중심의 사두개파가 몰락합니다. 이 과정에서 제의 중심의 유대교가 회당과 랍비 중심의 유대교로 변화하게 되었고, 기독교는 유대교의 분파가 아니라 독자적인 종교로 인식되게 됩니다.

 

 

 

부패와 재앙으로 가득찬 시기(주후 64-70)

 네로 황제의 박해(주후 64년경)때부터 예루살렘이 멸망(주후 70년경)한 이 사이의 6년은 부패와 재앙으로 가득했고, 곧 심판이 가까이 온 것으로 이해되었다. 로마의 이교도 조차 그 시기를 암흑기로 여겼다. 네로 황제의 통치 시기는 재앙와 전쟁 그리고 반란으로 인한 공포의 시대였다. 황제들이 살해 당하고 내전과 전쟁으로 혼란 했으며, 도덕성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로마 제국은 세금 수탈, 대제사장 임명 권한 침해, 예루살렘 성전에 황제의 신상을 세우는 등 정치적, 종교적 압박을 가했다. 네로 황제의 헬레니즘 장려 정책은 유대인들의 증오심을 증폭 시켰고, 열심당에 동조하는 세력을 키우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에 가장 불행했던 지역은 유대 지역이었다. 네로의 통치하에 받은 핍박들과 동족 유대인들에게 받은 핍박으로 예루살렘 교회의 수장 야고보가 순교하고, 유대전쟁으로 예루살렘이 멸망하는 심판의 날을 맞이해야만 했다.

 

 

 

유대-로마 전쟁 발발과 예루살렘의 함락(주후70년경)

 유대-로마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로마의 압제는 더욱 심해졌고, 도덕성은 더욱 부패하고 타락했다. 자객단(시카리)이 출물하고, 거짓 선지자와 거짓 메시아들이 등장해 로마에 대한 증오를 증폭시켰다. 주후 66년 게시우스 플로루스 총독이 성전금고에서 납세 명목으로 17달란트를 강탈한 사건은 유대-로마 전쟁의 시작점이었다. 당시 1달란트는 노예90명을 살수 있는 돈이었다. 플로루스는 잔인하고 물욕이 많은 총독으로 유대인들을 지속적이고 점진적으로 억압했다. 성전을 강탈한 사건에 저항하는 유대인들을 반란으로 취급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십자가에 못박고, 로마군에 약탈을 허용하였다. 이러한 억압에 맞서 유대인들은 황제의 안위를 위해 드리던 제의를 중단했고, 로마는 이것을 반역의 행위로 간주하게 되었다. 이러한 서로에 대한 적개심은 무력 충돌을 일으켰고, 결국 전쟁으로 번지게 되었다. 열심당은 유대인들에게 메시아 대망을 고취 시켰고, 이러한 투쟁은 곧 구원의 과정이라고 선동했다. 하지만 유대인들만의 자력으로 로마 제국에 도전한다는 것은 무모한 짓이었다. 어긋난 종교적 열광주의는 결국 그들을 멸망으로 이끌었다.

 

 

 반란 소식을 접한 네로 황제는 베스파시아누스와 군사 6만명을 파견해 갈릴리 지역을 점령하게 된다. 그리고 갑자기 네로는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네로의 자살 때문에 전쟁은 잠시 중단되었고, 이후 황제가 된 베스파시아누스(주후 69년경)는 자신의 아들 티투스와 8만의 군사를 예루살렘으로 파견한다. 티투스는 예루살렘 성전이 내려다 보이는 감란산에 진을 치고 예루살람을 포위한다. 이러한 압박에도 열심당은 항복을 거부하면서 로마에 저항한다. 유대인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유대인 포로들은 하루에 약 500여명 가량이 십자가에 처형을 당하게 된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기근이 심해져 굶주림에 수천명씩 쓰러지고, 자신의 아이를 잡아먹는 등 참혹한 광경이 벌어지게 된다. 그러나 열심당의 주도로 지속된 종교적 열광주의는 이러한 비참한 상황 속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저항하는 힘이 되었다.

 로마군은 마침내 성전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성전은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예루살렘 성이 있던 산은 불타오르고 피는 온 바닥에 낭자 했으며, 죽은자들의 수가 많아 맨땅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예루살렘에는 온통 시체들 뿐이었다. 어떤 유대인들은 성전의 불길을 잡으려 노력했지만, 어떤 유대인들은 성전이 불타오를 때 메시아가 오실거란 거짓 선지자의 말을 믿었다. 로마군은 폐허가 된 성전 동문쪽 위에 독수리 기장을 세우고 티투스 황제를 외쳤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는 순간이었다(마태복음 24:15). 이 사건은 고대사를 통틀어 영혼을 가장 뒤흔들어 놓은 투쟁으로 불리게 되었다.

 

예루살렘 함락 이후 유대 사회

유대-로마 전쟁으로 약 110만명이 살해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에 쓰러졌다. 일부는 노예가 되거나 검투장에서 희생되었다. 유대인의 나라와 성전은 폐허가 되었고, 주민들은 토지와 재산을 몰수 당하여 극빈자로 전락해 버렸다. 유대인들이 납부하던 세금이 로마 신전에 바쳐지게 되면서 유대인들에게 치욕을 안겨 주었다. 또한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로 성전 중심의 사두개파가 몰락했으며, 대제사장 제도는 폐지 되었다. 열심당은 숙청 당했으나, 바리새파는 살아 남아 유대의 서쪽 해안도시 "얌니아"에서 율법 학자들인 랍비 중심의 유대교를 세우게 된다. 그리고 폭동에 참여하지 않았던 기독교 공동체는 요단 동쪽 "펠라"로 피난을 가게 되었다.

 

 

 바벨론 포로기(주전 587-586)에서부터 시작된 성전과 제의 중심의 유대교는 유대-로마 전쟁의 여파로 쇠퇴하고 랍비 중심의 유대교로 변화하게 된다. 이로써 일부 성전 제의들이 받아들여진 형태의 회당 중심의 유대교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 모세 율법에 터를 둔 신정체제는 막을 내렸다. 이로써 기독교는 유대교의 분파가 아닌 독립적인 종교가 되었다. 기독교는 구약을 계승한 하나님의 참 백성이자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들이 되었다.

 

 

 

 

악마의 탈을 쓴 로마 제국의 네로 황제, 로마 대화재 사건, 기독교인 박해

개요 신약시대에 기독교 공동체에 대한 로마 제국의 박해는 간헌적으로 지속 되었습니다. 로마시 대화재 사건을 기점으로 사도 베드로와 바울 그리고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gongjeon.tistory.com

 

 

초기 기독교 공동체를 위협한 치명적인 문제들 : 영지주의, 율법주의, 재림지연, 로마제국의 박

개요 초기 기독교 공동체를 위협한 치명적인 문제들은 신약성경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내용들 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승천 이후 성장하기 시작한 기독교 공동체는 내외적으로 해결해

gongjeon.tistory.com

 

반응형

댓글